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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기웃기웃

국립중앙박물관)표암 강세황 전시회 , 탄신 300주년 기념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8. 27.

 

 

 

국립중앙 박물관에 왔어요

왜 왔게~

안알랴줌 ㅋㅋㅋ

 

표암 강세황 선생 전시를 보러 왔어요

일요일까지 한 전시회였는데

 

그림보면서 아 유쾌하다

라는 느낌은 잘 오지 않는데

 

위트있는 그림을 잘 보고 온 것 같아요

 

 


 

* 작품의 사진에 밝기 등을 조절하였고 효과를 집어넣었습니다.

(좀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 질감이나 표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절을 하였지만 감안하고 봐주셨으면 해서 설명을 덧 붙입니다.

 

* 전시회 작품을 전부 싣지는 못하였고, 그림은 있으나 설명이 없는 작품은

강세황 선생의 작품 중에 특히나 더 가치가 있거나 볼 수록 괜찮다는 느낌의

그림을 올렸습니다.

 

*강세황 선생을 제외하고 다른 분들의 작품도 있었지만 작품수가 상당해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길어요. 길면 기차.

 

*개인적인 의견 + 박물관 측 그림설명

 

 


 

 

 

 

 

"나는 키가 작고 외모도 보잘 것 없어서,

모르고 만난 사람 중에는

그 속에 탁월한 지식과

깊은 견해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여

 만만히 보고 업신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적마다 싱긋이 한 번 웃고 말았다"

 

 

이 말이 제법 멋 있다고 다른 분들은 생각하셨겠지만

지금생각해보니 엄청 겸손한 분이였다는 걸

깨달았지 뭐에요 ㅋ.ㅋㅋㅋㅋ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는건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그랬나봐요

 

 

 

 

 

강세황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 출신으로

시대를 잘못 만나 한스럽다고하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의식과 자부심을

잃지 않았고, 결국은

60세가 넘어 뒤늦게 출세하면서

만년에는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게 되었다.

 

 

올리기 전에 강세황 선생에 대해서 검색을 해봤는데

모 사전이나 모 사이트의 평은

'못 한게 아니라' '하지 않고 속세에 멀리'있었다고 하는데

'시대를 잘못 만나 한스럽다'고 한 것을 보면

 

옛 시대 양반이나 문인들은 보통

'속세가 싫고 궁궐다툼이 싫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는 벼슬에 나아가지 '못'함을 우회적으로

 

속세가 싫어서 안했음 이런 귀여운 변명 정도가 될까요 ;ㅁ;

 

* 속세를 떠나 수학을 하는 것이 그 당시 문인들의

'유행'이라면 '유행'이거나

 

-정치적 상황이나 기타 여건들을 제외-

 

한 분 한 분이 모두 '속세를 떠나 자연을 벗삼아'라는

'전해지는 말'들이  '자연 벗삼기' 유행인가라는

 

우스운 상상도 (...)

 

 

 

 

 

 

 

강세황이 지금 사람들에게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김홍도, 신위등의 스승이었기때문인 것 같아요

 

아는 분들은 알지만 모르는 분들은 모르는

그런 느낌?!

 

당대 사람들은 그를 삼절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시, 글씨, 그림)

 

 

 

 

 

 

 

김홍도의 그림도 몇 작품 있었구요

강세황 선생 그림을 보고나서보니

 

좋은 그림이고 훌륭하고

지금에서도 가치가 높은 그림을

그린 분임에는 분명하지만

 

'평범'해보이는 그림들

 

 

 

 

 

자화상이나 그런것들을 즐겨 그렸다고 하는데

(자의식이 강함)

주름이라던가 수염, 피부 부터 해서 세밀한 표현에

굉장히 능한 분이라고 생각이 들더라구요

 

자꾸보는데 지폐가 생각나고(!)

 

 

 

 

'몸에는 평상시 입는 옷을 입고,

머리에는 관복에 쓰는 오사모를 착용한 자화상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차림새다.

그는 "마음은 산림에 있으나 조정에 이름이 올랐다"는

재치있는 글을 화면 위에 남김으로써

, '출사'와 '은일'을 동시에 지향하는

 조선 18세기 문인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

 

읽을거리

 

오사모에 대한 이야기

 

 

 

강세황 아들 강완의 작품

 

 

 

 

 

손자 강이천의 작품

같은 대나무 작품이 아니라

비교대상이 되기엔

 

좀 어려운 부분이 있으나

 

손자 강이천의 그림이 더 낫구나 했던 그림

 

7~8세부터 문장을 잘 지었고

어린나이에 입시하여

임금의 감탄과 칭찬을 받았고

( 뭔가 설명이 자소서같은 느낌)

 

대나무 그림에는 특히 더 빼어났다고 합니다

 

시원시원한 맛이 있지요?

 

 

 

18세기에는 실제 경치를 그린

진경산수화가 성행한 시기라고 합니다.

 

"진경산수는 그곳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속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그림"

그런 면에서 시보다는 기행문이,

기행문 보다는 그림이 낫다고 믿었다고 해요.

 

겸재 정선의 금강산의 그림을 보고는 현장의 구별없이

관습적인 화법으로 그림을 비판했다고 합니다.  

 

 

 

 

 

강세황의 그림을 봐야겠다 마음을 먹은 건

다른 분들의 블로그 글이라던가

강세황 선생이 김홍도의 스승이였다라던가

 

그런 이유가 아닌 다음의 일화때문이었어요 ㅋ.ㅋ

 

 

"중국 화가들의 대나무 그림이 더 좋은 이유가

종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여 중국 종이에 대나무 그림을 그려보았다."

 

 

 

 

 

여성적인 섬세함도 있었던 걸까요

어떤 사람들은 강세황 선생을 두고

자의식이 강하거나 성격이 대단했을거라고

으레 짐작을 하지만

 

저는 반대로 소심했기때문에 강했고

섬세했기때문에 자의식이 강했다라고

생각했어요

 

 

포도는 괜찮으면서

무를 보고 왜 갑자기 무야 ㅋㅋㅋㅋ

라면서 강세황 선생을 귀엽다고

생각했을까요

 

 


 

 

 

 

 

 

 

 

 

난이나 대나무등의 그림으로 최고를 손꼽으라면

강세황 선생을 이야기 할 것 같아요

 

난이나 대나무 그림에 대해서 문외한이기도 하였지만

잘모르겠다라는 반응이였는데

 

강세황의 난이나 대나무를 보고 나서

 

'아 그렇구나'

 

 

군더더기가 없으면서도

우아하고

 

우아하면서도

위트있고

 

위트있지만 가볍게 볼만한 그림은 아닌.

 

 

 


 

 

 

 

나귀(?)가 사실적이고

귀여워서 찍어달라고

부탁했던 작품

 

 

 

 

 

"사군자와 글씨"

 

 

 

 

 

 

 

조선시대 회화의 소재로 해당화를

그린 일은 드문일이라고 합니다.

(그림 소재의 다양성을 이야기 하려는 듯)

 

 

 

 

 

우금암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절필기에 그린 것.

 

부안지역을 그린 현존하는

유일한 실경산수화라고 합니다.

 

 

아 뭔가 수채화 같기도 하고

이 느낌은 뭐지 이랬는데 ㅎ.ㅎ

 

'영통동 입구'

 

 

송도 일대 풍경을 그린

현존하는 유일한 서화첩

 

원근법

음영법

입체감 등의

서양화법을 수용한

 

그림

 

노란색, 청록색, 갈생 등의

맑은 채색을 사용한 점이 특징

 

 


 

 

 

 

 

 


 

 

 

"금니로 그린 산수"

 

강세황 작품 중 유일하게 금니로 그려진 그림

 금니로 그린 산수는 주로 조선 중기에 많이 그려졌대요

 

 

 

 

 

 

설명을 보니 경기체가 작품(한림별곡)이 떠오르더라구요

비단에다가 금니로 그림을 그리질 않나 ㅜ.ㅜ

 

 

균와라는 장소에서 강세황

심사정, 허필, 최북

김홍도, 김덕형 등

18세기 후반대표 화가들을그린

아집도 라고 합니다.

 

 

나무와 바위를 그리고 담황색을 사용하여

엷은 채색을 가한 것은 심사정과 최북

가는 붓으로 간략히 묘사한 인물 표현은 김홍도

전체구도는 강세황의 솜씨

 

 

 

 

김홍도의 "나비"

 

 

 

 

보고 와와 했어요

확실히 흔한 그림도 아닐뿐더러

 

대나무 자체도 멋지고

눈쌓인 대나무라니

 

작자미상의 그림이고

강세황은 이 그림을 보고

마치 실물을 그린 것 같다는 평을 했다고 해요

 

설명에는 유덕장을 연상시킨다는 설명이있더라구요

 

 

 

 

2부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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